들어오라

숲가에 오니

문득 들려오는 티티새의 노랫소리!

밖이 어스름이라면

안은 어두웠다.

숲은 너무 어두워 새가

날쌔게 날갯짓하여도

더 나은 잠자리를 찾아갈 수 없었네

노래는 할 수 있을지언정

 

마지막 햇빛은 

서녘으로 스러졌으나

한 노래 더 하려는

티티새의 가슴에는 남아 있었네

나무기둥 서 있는 어둠 속 멀리

티티새의 노래는 울려 퍼졌네

어둠 속으로 들어와 

통곡하라는 부름처럼

 

허나 아니, 나는 밖에서 별을 보리라

들어가지 않으리라

청을 받았다 해도

그런 청도 없었지만

​로버트 프로스트, 1942

순항과 모색. 모든 것은 신호이다

박종규의 예술세계에 대해

​그레고어 얀젠 ㅣ Gregor Jansen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 미술관장

모든 생명체는 물에서 온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알고 있듯 과거 지구에 존재했고 현재 삶을 영위하는 모든 생명체는 물에서 기원했다. 백만년 전 물에서 일어난 햇빛 광선의 복사, 빛의 굴절 그리고 물의 영양소로 분자가 형성되어 최초의 단세포가 출현하였듯, 물을 안고 있는 바다는 먼 옛날 생물에 삶을 선물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비단 과거를 넘어 바다는 현재와 미래에도 절대적 의미를 띈다. 사실 바다는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생명체를 수용하고 있다. 현미경을 통해 식별이 가능한 초미세 단세포 식물부터 몸집이 거대한 동물까지, 가혹할 정도로 빠르게 파괴되고 있는 매우 복합적인 생태계라 할 수 있다. 바다와 반짝이는 얼음 표면 위 빙하 또는 하늘의 구름까지 물은 모든 다른 생명의 공간과 우리의 세계와 지구에 엄청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박종규는 직렬로 낙하하는 맑고 밝은 물줄기인 폭포의 이미지를 검은 배경에 대비시켜 구현하였다. 이는 시간과 요소 그리고 삶의 흐름을, 궁극적으로는 자연 한가운데 사물의 순환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스크린 위 하얀 픽셀로 물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알고리즘 형태인 이 형상은 인공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종규가 구현한 물줄기는 물에 대한 다양한 연상 외에도 또 다른 해석을 연상시킨다. 이 픽셀의 흐름은 화이트 노이즈, 즉 백색 소음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끊임없는 데이터 흐름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메타포로도, 또는 가상의 환상이 일어나는 즉, 가상의 세계가 실제 및 상상의 세계와 다채롭고 또 영구적으로 혼재하는 매트릭스로도 확장시켜 해석할 수 있다. 세계는 단지 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모든 생명체는 물에서 기원하지만, 세계는 신호이기도 하다. 인간이 “읽을 수 있고” 그렇기에 인식이 가능한 모든 의미가 신호를 기원으로 한다.

 

대구 태생의 박종규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로도 “읽을 수 있는”, 역동적이고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의 신호를 주제로 하였다. 회화 작업을 주로 하지만, 비디오아트와 설치미술도 작품에 접목해 소실점과 중심 관점이 없는, 가상의 3차원성을 창조함으로써 설득력 강한 인상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다. 2015년부터는 주로 래스터 그래픽스를 작품에 접목해, “점”과 “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미지의 최소 단위인 픽셀에서 파생되어 창조된 패턴을 바탕으로 하는 매트릭스가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물과 강, 바다에서 들을 수 있고 신호전달에서 “백색소음”으로 알고 있는 “노이즈”라는 개념을 작품에 사용한다. 백색소음은 특정 대역대에서 지속적인 전력 스펙트럼 밀도로 발생하는 소음이나 사운드이다. 신호 전송이 끊기면서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정지한 TV 화면, 오늘날에는 구닥다리로 보이는 그 모습을 백색소음의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겠다. 시끄러운 잡음에 백색소음을 오버랩하면, 사람들은 이 소음을 더 이상 시끄러운 잡음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현대음악에서 사운드는 “배제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박종규는 자신의 작품에서 노이즈가 됐건 사운드가 됐건 아니면 “소음”이나 백색소음이 됐건 이 모든 다양한 소리를 생산적인 차원에서 유선형 사회나 주류 예술에서 배제된 것, 동질적 대상인 바다 한가운데로 즉시 사라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박종규 작가는 이를 위해 시각언어를 창조해 생산적인 영상방해의 재현을 점과 선으로 코드화하며 소음을 “내포되면서 배제된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 시도로 긍정과 부정, 0과 1, 옳고 그름, 검정과 하양 등 양극의 갈등 틀이 해체된다.

대구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 타이틀에 쓰인 “Kreuzen”라는 독일어 단어는 Kreuz(십자가) 복수형의 2격 형태이면서 항해 용어이기도 하다. 또한 물결표 ~를 사용해 미확정의 것, 부정(否定)의 것 또는 변형의 것으로 확대해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단어가 항해에서 쓰일 때는 역풍으로 인해 목표점으로 일직선으로 항해할 수 없을 경우 바람을 거슬러 '지그재그‘로 목표점을 향해 항해하는 것을 의미하나, 또 한편으로는 크루저선을 타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 이곳저곳에 기항하면서 휴양을 즐기는 “Kreuzfahrt(크루즈)”를 의미하기도 있다. 이곳저곳을 항해하는 배를 의미하는 17세기 네덜란드 단어 “kruiser”에서 유래했다. 박종규는 2015년의 <Encoding>, 2016년의 <Maze of Onlookers>, 2017년과 2018년의 <Embodyment>와 같이 연구와 실현 단계였던 2015 이후의 시리즈와는 다른 개념을 이번 작품 시리즈와 전시에 접목하면서 올해부터는 미래로 항해 하겠다는 바람을, 다른 경로의 길을 가고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인 대양으로 크루즈 하겠다는 바람을 표현한 듯 하다.

바다와 대양 그리고 물을 이해하려면, 여행·관찰·연구를 통해 조사하고 분석해야 한다. 바다는 그 자체로 거대하고 역동적인 생태계로 볼 수 있다. 물론 해양 생태계에는 다양한 열대 산호초, 거칠게 파도치는 바닷가 그리고 대양과 같은 생태계가 독자적이고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번 박종규의 전시에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무한한 데이터의 흐름보다 백색 소음, 바다나 물의 사운드가 더 중요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그림이론을 제시한 저서에서 언어와 그림을 신호체계와 연관해 이해하는 주요 방식을 소개하였다. 이에 따르면 ‘읽기(reading)‘를 구조화하는 방식에 따라 그림과 단어예술을 연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의미를 설명하는 설명이다”라고 다소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패러프레이즈(paraphrase)로 의미를 구성하고,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 맥락 하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말은 삶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겐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고립된 신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 “신호는 체계에서 산다”고 그는 확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신호는 한 대상과 동일화할 수 없고, 문장이 언어 내에서 의미가 있듯이 신호 또한 신호의 체계 내에서 의미를 유지한다고 강조한다. “한 체계 안에 절대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적 종속성의 관계만이 있다”. 소쉬르(Saussure)와 폴 리쾨르(Paul Ricoeur)와 같은 언어철학자도 이와 유사한 정의를 내렸다. 소쉬르의 말 “언어는 실체가 아니라 형태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물을 명명하는 것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호를 이해하는 것은 요소로 구성된 체계를 다룬다는 의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름과 같은 신호는 임의로 명명하지만, 의미가 발생하는 이름으로 구성된 그림으로 된 문장은 임의로 명명하지 않는다고 예를 들었다. 언어는 거대한 언어의 관계에서 많은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하나 이상의 사물신호(이름단어)로 구성된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관계 현상은 단어가 시를 만드는 것처럼 “사물 요소” 하나의 그림을 형성하는 박종규의 시각언어에서도 등장한다. 박종규의 언어는 자유로운 예술적 선택을 따르고 명료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지만, 이와 같은 결합은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즉 다른 말로 표현을 바꾸는 방식이 다양한 신호 형태의 내적 연관관계를 반영한다고 고찰한 대로다. 이와 유사하게 그림은 현상학적 요소로 분류되며 이에 대한 설명을 구두로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내적 연관관계가 관계체계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사고는 일종의 언어이다”라고 정의하며 이와 같은 “관계 내의 사고방식”을 다루었다. 이와 같은 그림이론의 사고는 사고를 그림의 신호와 비교하는 것을 마지막 과정으로 한다. 바로 여기서 그림 구상의 창조적 행위가 시작된다. 사고의 본질이 그림에 있다는 연관관계를 효율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그림의 미확정성 그리고 애매모호성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호론자 움제르토 에코(Umberto Eco)가 확인하였듯 신호는 일련의 관계에서 발생한 산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신호는 단절된 완전체가 아니다. 읽는 행위는 시적 언어와 시각언어를 수단으로 상호작용을 통해 내용을 구축한다. 프로스트의 시나 박종규의 그림 모두 이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연관관계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관계를 바탕으로 우리가 박종규의 작품을 감상하면, 그림을 “읽는 것“으로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구사마 야요이(Yayoi Kusama) 또는 지그마 폴케(Sigmar Polke)의 초기 래스터 그림과는 다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독일 출신의 폴케는 전세계적으로 양식적 다원주의의 대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에게 20세기 스타 화가의 안겨준 것이 1960년대의 래스터 그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양식적 다원주의의 대가라는 명칭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신문을 모티브로 하여 신문인쇄의 포인트 래스터(point raster)를 자신의 회화 작업에 수용한 폴케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전통적인 폴카 도트(Polka dots, 물방울 무늬)가 폴케 도트(Polke-Dots)로 해석되고 있을 정도이다. 전통적인 목판·금속 인쇄와 유사하게  신문에 실린 사진만큼은 래스터 기술을 이용했다. 신문 텍스트는 컬러를 유보적으로만 사용해, 다른 모든 색을 제외한 검정색과 흰색의 텍스트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on/off/, 0/1, color/non-color 등을 바탕으로 하는 코드 시스템이 디지털화에도 절대적으로 적용된다는 현상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박종규는 이 원칙을 내면화해 그의 새로운 그림으로 우리에게 항상 놀라움을 안겨 준다. 음악가나 지휘자는 작곡가의 악보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오케스트라 전체가 소박하지만 청중을 압도하며 연주하는 것을 상상하는데, 박종규의 그림은 관람객에게 악보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지그마 폴케와 유사하게 박종규도 옵아트(Op-Art)의 래스터나 팝 아트(Pop-Art)의 래스터를 이용해 점과 선을 그리는데 큰 즐거움을 느낀다. 물론 그의 그림이 50년 전 폴케의 작품과 더 이상 공통점이 없을 지라도 말이다. 가장 큰 차이는 오늘날 디지털의 흐름과 물결 속에서 우리가 유래한 바다를 잊고 있는 세계의 가독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종규는 이 바다를 모색하고, 연구하며, 그림으로 데이터의 흐름을 물질화하고 동시에 무형으로 투영한다. 이 맥락에서 프랑스의 그 누구보다 위대한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가 떠오른다. 그는 티리 채펏(Thierry Chaput)과 함께 이 주제를 놓고 어떤 전시회도 열지 않았다. 이들은 1985년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급진적인 철학적 사고를 추구하는 <비물질성(Les Immatériaux)> 전을 기획하였다. 신기술의 활용과 이 기술의 “무형성“의 사용으로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물질적 가치 간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주제로 한 이 전시회는 거대한 규모의 복합적인 시노그래피(scenography)를, 즉 총 61개를 거점으로 하는 미로와 같이 구불구불한 시스템을 소개하였다. 관람객에게는 소리나 문자, 그 어떤 것으로도 동선 안내를 하지 않았다. <비물질성>은 양극화된 세계질서가 붕괴되고 전세계를 강타한 인터넷 출현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기 4년 전 당시 경험의 실험실로, 즉 방향감각 상실의 실험실로 고안되었다. 리오타르(Lyotard)의 전시회로 관람객이 느낀 불안감은 그 당시에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주체성을 잃고 있는 인간의 상태를 반영한다. 리오타르는 이를 단지 위험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다른 방식을 실험하는 기회로 보고 이 전시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사고를 문자 그대로 장면화“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를 회화화하면서, 즉 사고가 그림이 되게 하면서, 이를 장면화하였고 자신의 시대를 앞서갔다. 

그림은 복합성, 모순성, 불분명성으로 우리를 도전하고 도발하며 좌절하게 한다. 그러나 그림의 이와 같은 성격이 해석학적 자행으로 그림을 동일한 의미관계로 축소하도록 사고하는 동기가 되지는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박종규의 작품은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명료하지만 복합적이고, 읽을 수 있지만 불분명한 대상의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그의 작품은 점, 선, 래스터, 코드, 픽셀을 서로 결합하여 계획되지 않고, 예상할 수 없던 무언가를 만드는 형태로 재현된다. 작가와 관람객 모두 이 예측불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 이를 허용하는 태도, 예상치 못한 것을 수용하는 자세는 그러나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사고를 의미하는 독특한 “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과 예술, 디지털과 물질적인 것, 그림과 실제, (이 텍스트에서도 시적인 유희인) 물과 공기 간 연상이 시작되고 그러면 이 예측불가능성은 더 이상 변두리적 현상이 아니게 된다. 리오타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고를 '주어진' 데이터 [...]에서 선별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진실을 숨기는 것이다. 데이터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질 수' 있는 것이고, 선별은 선택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쓰고 그리는 것처럼 사고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오도록 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전시회에서 사고가 오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박종규의 시도에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또한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사고를 하고 궁극적으로 작품을 보면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나아가 인류학적으로도 포스트모던 시대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시대의 문화학에서는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치욕적 오명이라고 하며,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과 사물이란 저서(1966)에서 쓴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유명한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종규의 그림과 작품 안에서 또는 앞에서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다시 백사장에 앉아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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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IN

As I came to the edge of the woods,

Thrush music -- hark!

Now if it was dusk outside,

Inside it was dark.

 

Too dark in the woods for a bird

By sleight of wing

To better its perch for the night,

Though it still could sing.

 

The last of the light of the sun

That had died in the west

Still lived for one song more

In a thrush's breast.

 

Far in the pillared dark

Thrush music went --

Almost like a call to come in

To the dark and lament.

 

But no, I was out for stars;

I would not come in.

I meant not even if asked;

And I hadn't been.

 

Robert Frost, 1942

Kreuzen und Polken. Alles ist Zeichen. 

Zur Kunst von Jong Kyu Park

Gregor Jansen

Direktor der Kunsthalle-Duesseldorf

Alles Leben kommt aus dem Wasser. Wie wir seit einigen Dekaden wissen, stammt alles auf Erden gewesene wie existierende Leben aus dem Wasser. Doch das Meer ist nicht nur Lebensspender der Vergangenheit, womöglich hat vor zig Millionen Jahren durch Sonneneinstrahlung, Lichtbrechung und Nährstoffgehalt des Wassers eine Molekülentwicklung stattgefunden, aus denen sich die ersten Einzeller entwickeln konnten, sondern es ist ebenfalls von zentraler Bedeutung für Gegenwart und Zukunft. Tatsache ist, dass das Meer heute einer immensen Anzahl und Vielfalt an Lebewesen ein Zuhause bietet - angefangen mit mikroskopisch kleinen einzelligen Pflanzen bis hin zu den größten lebenden Tieren, ein hochkomplexes Ökosystem, welches der Mensch leider aber momentan rasant und stark zerstört. Desweiteren hat das Wasser, das Meer wie die Eismassen der Polkappen oder die Wolken im Himmel, enormen und direkten Einfluss auf alle anderen Lebensräume auf unserer Welt, der Erde..

Jong Kyu Park hat einen Wasserfall animiert, eine Kaskade von Wasser, welches hell und klar vor schwarzem Hintergrund unendlich nach unten fällt. Es symbolisiert den Lauf der Zeit, der Elemente und des Lebens, einen Kreislauf der Dinge inmitten der Natur. Gleichwohl ist sein Wasser künstlich, eine reine algorithmische Formel, die uns angesichts der weißen Pixel auf einem Screen an Wasser denken lässt. Neben den vielfältigen Assoziationen zum Wasser halten auch die Kaskaden bei Park zahlrieche Assoziationen bereit, den Pixelstrom als White Noise / weißes Rauschen zu interpretieren, als Metapher des unendlichen Datenstroms globaler Natur, als die Kommunikation, die Matrix, die Illusion des Virtuellen und die permanente Vermischung des Virtuellen mit dem Realen und unseren Vorstellungswelten auf mannigfaltigen Ebenen. Die Welt ist nicht nur Wasser, oder anders formuliert, alles Leben entstammt dem Wasser, auch ist die Welt Zeichen, oder jede für Menschen „lesbare“ und damit erkennbare Bedeutung entstammt der Zeichen.   

Die Ausstellung des in Daegu geborenen Künstlers J. Park verhandelt diese Zeichen der analogen wir digitalen „Lesbarkeit“ einer sich stark verändernden und radikal verändernden Welt. Verhandelt er vorrangig Malerei, aber auch Videoarbeiten und Installationen, so schafft er in überzeugender Weise ein eindrückliches Bild der Malerei in der imaginierten Drei-Dimensionalität ohne Fluchtpunkte oder eine Zentralperspektive. Hierbei dienen seit 2015 in erster Linie Rasterpunkte, eine Matrix basierend auf dem Muster von "Punkten" und "Linien", das aus der kleinsten Einheit digitaler Bilder, den Pixeln abgeleitet ist und herausgearbeitet wurde. Er selbst benutzt den naheliegenden Begriff des „Rauschens“, wie wir es beim Wasser, vom Fluss oder Meer, aber auch als „Weißes Rauschen“ in der Signalübertragung kennen. Weißes Rauschen ist ein Rauschen, oder ein Sound, mit einem konstanten Leistungsdichtespektrum in einem bestimmten Frequenzbereich. Als Bild ist es das heute obsolet gewordene Grisseln des Bildschirms, wenn kein Signal mehr übertragen wird. Lärm und andere Störgeräusche werden subjektiv weniger laut und störend empfunden, wenn man sie mit weißem Rauschen überlagert. Als Sound wird es in der modernen Musik als "etwas Ausgeschlossenes" interpretiert und in Parks Werken bedeutet Noise, Sound oder „Lärm“, Rauschen und all dies in unterschiedlichen Facetten, aber auch, das Lärm oder Signalstörungen im produktiven Sinne von der Stromlinien-Gesellschaft oder Mainstream-Kunst ausgeschlossen sind, im Meer des Gleichgeschalteten sofort untergehen. 

Der Künstler hat hierfür eine Bildsprache entwickelt, die Frage nach einer Darstellbarkeit von produktiven Bildstörungen in Punkte und Linien kodiert, um es als das eingeschlossene Ausgeschlossene zu definieren. Dies führt zur Auflösung des Rahmens binärer Gegensätze zwischen Ja und Nein, 0 und 1, richtig und falsch und zwischen schwarz und weiß.

Seine Ausstellung im Daegu Art Museum trägt den Titel „∼Kreuzen“, was auf Deutsch die Genitivform des Plurals von Kreuz darstellt und als Begriff im Segelsport verwendet wird. In Verbindung mit der Tilde ∼ ist es aber auch eine Erweiterung ins Ungefähre, Verneinte oder eine Variable. Es bedeutet beim Segeln im „Zickzackkurs“ ein Ziel anzulaufen, welches im Wind liegt, da es wegen des Gegenwindes nicht geradewegs angesegelt werden kann. Aber es kann auch „Kreuzfahrt“ bedeuten, wobei als Kreuzfahrt eine Urlaubsreise auf einem Kreuzfahrtschiff gemeint ist, bei der entlang einer bestimmten Route verschiedene touristische Ziele angelaufen werden. Der Begriff hat seinen Ursprung in dem niederländischen Wort „kruiser“ aus dem 17. Jahrhundert, der ein kreuzendes (im Sinne von hin und her fahrend) Schiff bezeichnete  Bei Park, so vermute ich, bedeutet die Verwendung dieses Begriffs seiner aktuellen Werkserie und der Ausstellung – anders als die Serie seit 2015 „Encoding“ in 2015, „Maze of onlookers“ in 2016, „Embodiment“ in 2017 und 2018, die eine Phase der Erforschung und Verwirklichung waren –  jetzt seit diesem Jahr den Wunsch, dass es eine Entdeckungsreise in die Zukunft ist, ein wechselnder Kurs, eine Kreuzfahrt auf dem weiten Meer, aus dem alles Leben stammt.

Will man das Meer, die Ozeane und das Wasser verstehen, muss man es bereisen, beobachten, untersuchen, erforschen und analysieren. Das Meer an sich kann als ein großes, dynamisches Ökosystem betrachtet werden. Allerdings gibt es in diesem Ökosystem viele weitere, eigenständige Ökosysteme, wie beispielsweise zahlreiche tropische Korallenriffe, raue Küstengewässer und eben auch das offene Meer – die Ozeane. Wichtiger hier im Zusammenhang mit Parks Ausstellung aber ist das Rauschen, der Kang des Meeres oder Wassers, als ein unendlicher Datenstrom im Fluss der Zeit.  

 

Ludwig Wittgenstein lieferte in seinen philosophischen Werken zur Bildtheorie wichtige Ansätze zum Verstehen von Sprache und Bildern im Kontext ihrer Zeichensysteme. Bild- und Wortkunst werden daraufhin untersucht, wie sie das „Lesen“ gestalten. Zuerst formuliert Wittgenstein scheinbar paradox: „Die Bedeutung des Wortes ist das, was die Erklärung der Bedeutung erklärt.“ Die Paraphrase konstituiert die Bedeutung. Und die Bedeutung des Wortes generiert ihren Sinn innerhalb des Kontextes weiterer Worte. Mit Wittgenstein gesprochen: „Nur im Fluß des Lebens haben die Worte ihre Bedeutung.“ Somit gibt es für Wittgenstein kein isoliertes Zeichen, das für sich eine Bedeutung haben könnte. Vielmehr steht fest: „Das Zeichen lebt im System.“ Dabei betont Wittgenstein, dass ein Zeichen nicht mit einem Gegenstand gleichzusetzen ist, sondern seine Bedeutung in einem System von Zeichen erhält; so wie der Satz innerhalb der Sprache. Ähnlich haben es bereits die Sprachphilosophen de Saussure und Paul Ricoeur definiert: „In einem System gibt es keine absoluten Begriffe, nur Beziehungen gegenseitiger Abhängigkeit, wie Saussure es ausdrückte: „Sprache ist keine Substanz, sondern Form.“ Ein Zeichen zu verstehen bedeutet also, mit einem System von Elementen zu arbeiten, denn mit „dem Benennen eines Dings ist noch nichts getan.“ Er nennt das Zeichen z. B. Namen, beliebig, nicht aber den Bild-Satz aus Namen bestehend, der einen Sinn führt. So wie Sprache aus mehr als nur Ding-Zeichen (Namenwörtern) aufgrund ihrer vielen Funktionen im Rahmen ihres riesigen Sprachzusammenhangs besteht, so kündigt sich dieses Phänomen von Beziehungen auch in Jong Kyu Parks  Bildsprache an, in der die „Ding-Elemente“ ein Bild ergeben wie die Wörter ein Gedicht. Während Parks Vokabular einer freien künstlerischen Auswahl folgt und erstmal keinen definitiven Sinn in sich trägt, erzeugt die Zusammenstellung möglicherweise Bedeutung. So wie Wittgenstein reflektierte, dass erst die Möglichkeit der Paraphrase, also die Umschreibung, den inneren Zusammenhang der verschiedenen Zeichenformen wiedergibt. Ähnlich wird das Bild in seine phänomenologischen Bestandteile gegliedert, um zu einer verbalen Beschreibung zu gelangen. 

Es ist der innere Zusammenhang, der den Beziehungssystemen Vorrang gibt. Diese „Denkweise in Relationen“ greift Wittgenstein bereits im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auf, vielmehr noch: „Das Denken nämlich ist eine Art Sprache.“ In Ausführung dieses Gedankens zur Bildtheorie ist die letzte Konsequenz, dass das Denken mit dem Zeichnen von Bildern zu vergleichen ist. Hier beginnt der schöpferische Akt der Bildkonzeption. Entscheidend für die Wirkungsweise von Denk-Bildern ist ihre Offenheit, ja Vieldeutigkeit. Zeichen sind, wie der Semiotiker Umberto Eco konstatiert, keine isolierte Entität, denn sie sind als ein Produkt einer Reihe von Relationen zu verstehen. Mittels dichterischer oder bildnerischer Sprachmitteln baut das Lesen im Zusammenspiel einen Gehalt auf. Auf dieser Basis ist ein Gedicht Frosts oder die Malerei Parks mit Hinblick auf die Relationen, die hergestellt werden, zu analysieren.

Schauen wir vor diesem Hintergrund auf die Werke Parks, stellen wir fest, dass ein Sinn im „Lesen“ der Bilder nicht erreicht werden kann, was im Gegensatz zu den frühen Rasterbildern bei Roy Lichtenstein, Yayoi Kusama oder Sigmar Polke anders zu verstehen ist. Gerade der Deutsche Polke punktete weltweit als "Meister des Stilpluralismus"; was man durchaus wörtlich nehmen durfte, denn es waren seine in den 1960er Jahren entstandenen Rasterbilder, die seinen Ruhm als Malerstar des 20. Jahrhunderts begründeten. Für sie übernahm er mit dem Zeitungsmotiv auch das Punktraster des Zeitungsdrucks in seine Malerei, wo er es so erfolgreich aufblies, dass mitunter die traditionellen Polka-Dots als Polke-Dots interpretiert werden. Ähnlich den klassischen Druckverfahren in Holz oder Stahl wurden auch die Zeitungen in Raster angelegt, was zumindest die Bilder anging. Beim Text war es ebenfalls nur erhaben für Farbe oder zurückgenommen, und damit keine Farbe, schwarz und weiß. Erkennbar ist überall, dass Codesysteme generell auf an/aus, 0/1, Farbe/Nicht-Farbe usw. beruhen, was absolut auch für die Digitalisierung gilt. Jong Kyu Park hat dieses Prinzip verinnerlicht und verblüfft uns immer wieder neu mit seinen Gemälden, in denen wie bei Notenblättern von Komponisten für die Musiker oder Dirigenten ein ganzes Orchester beginnt zu spielen, nicht in real, schlicht und ergreifend beim Betrachten der Noten. Ähnlich wie bei Sigmar Polke hat Park eine große Freude beim Malen der Punkte und Linien, der Raster auf Op-Art oder Pop-Art Linie, gleichwohl seine Gemälde mit den Werken vor 50 Jahren gar nichts mehr gemeinsam haben. Der gewaltige Unterschied liegt in der Lesbarkeit einer Welt, in dessen Strom und Fluss des Digitalen das Meer in Vergessenheit geraten ist, aus dem wir stammen. Bei Park wird dieses Meer gesucht, erforscht, der Datenstrom als Malerei materialisiert und zugleich immaterial transparent. Es war kein geringerer als der französische Philosoph 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der diesem Thema zusammen mit Thierry Chaput keine Ausstellung widmete. Sie kuratierten im Pariser Centre Pompidou die Ausstellung "Les Immatériaux" (1985), bei der eine radikal neue Praxis philosophischen Denkens anvisiert werden sollte. Die Ausstellung, die um die Frage kreiste, wie sich durch den Einsatz neuer Technologien und ihrer "Immaterialien" die Beziehung zwischen dem Menschen und der ihn umgebenden materiellen Welt verändern werde, hatte eine immens komplexe Szenografie, ein labyrinthartig verschlungenes System mit insgesamt 61 Stationen. Den Besuchern wurden weder auditiv noch schriftlich eine Orientierung zu ihrer Erkundung gelliefert. "Les Immatériaux" ist als Laboratorium einer Erfahrung gedacht, welche sich vier Jahre vor dem Zusammenbruch einer bipolar geprägten Weltordnung und der weltumspannenden Implementierung des Internets umrisshaft abzuzeichnen begann: die der Desorientierung. Die aufreizende Verunsicherung des Publikums durch Lyotards Ausstellung reflektierte den Zustand eines Menschen, dem damals schon und heute mehr denn je seine elementaren Selbstverständlichkeiten abhanden zu gehen drohen. Dies nicht nur als Gefahr, sondern auch als Chance in den Blick zu nehmen, andere Weisen menschlichen Daseins auszutesten, war Lyotards Anliegen. Mit "Les Immatériaux" setzte er "sein philosophisches Denken im wahrsten Sinne des Wortes in Szene." Und er setzte es in Szene, indem er sein Denken bildlich, ja, indem er es zum Bild werden ließ, und seine Zeit damit voraus war.

Dass Bilder uns durch ihre Komplexität, ihre Widersprüchlichkeit, ihre Uneindeutigkeit oft überfordern, provozieren oder resignieren lassen, ist der Praxis dieses Denkens nicht mehr Anlass, sie durch einen Akt hermeneutischer Willkür auf einen einheitlichen Sinnzusammenhang zu reduzieren. Hier führen uns die Werke Jong Kyu Park in eine andere Dimension und befassen sich mit Faszination des zugleich Eindeutigen und Komplexen, Lesbaren und Uneindeutigen. Es selbst bewegt sich in Figurationen, die Punkte und Linien, Raster, Codes und Pixel als malerische Elemente so miteinander verschränken, dass etwas Ungeplantes, völlig Unerwartetes dabei entstehen kann. Der Künstler wie die Betrachter müssen es nur zulassen. Dieses Zulassen-können, die Empfänglichkeit für das Unverhoffte aber könnte jenes eigenartige "Vermögen" sein, das philosophisches wie künstlerisches Denken gleichermaßen auszeichnet. Und vielleicht beginnt sich an diesem Punkt eine Assoziation zwischen Philosophie und Kunst, Digitalem und Materiellem, Malerei und Realität, Wasser und Luft (als poetisches Spiel auch hier in diesem Text) abzuzeichnen, die dann nicht mehr nur peripher wären. Lyotard sagte das so: "Wenn man glaubt, Denken als Selektion aus 'gegebenen' Daten [...] beschreiben zu können, dann verschweigt man die Wahrheit: die Daten sind nicht 'gegeben', sondern können 'gegeben sein', und die Selektion vollzieht sich nicht als ein Wählen. Wie Schreiben und Malen ist Denken eigentlich nichts anderes als das Kommenlassen dessen, was gegeben sein kann." 

In diesem Sinne gratuliere ich Jong Kyu Park zum sinnlichen Kommenlassen in seiner Ausstellung und freue mich auf das sehende Denken und letztlich sehendes Sehen, denn damit ist viel gewonnen. Nicht nur philosophisch, sondern vor allem anthropologisch in einem zu Ende gehenden Postmoderne-Zeitalter, in denen die Rede vom Menschen gerade in den Kulturwissenschaften einen miesen Ruch hat und der Verweis auf den berühmten Schlusssatz in Michel Foucaults Ordnung der Dinge (1966), dass der Mensch verschwinden werde »wie am Meeresufer ein Gesicht im Sand«, immer noch nachhalt. In oder vor und mit den Malereien und den Werken von Jong Kyu Park sollten wir uns wieder an den Strand setzen und das Meer in all seiner Schönheit betrachten (lernen) und, was letztlich das Wesentlichste ist, danach handel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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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IN

As I came to the edge of the woods,

Thrush music -- hark!

Now if it was dusk outside,

Inside it was dark.

 

Too dark in the woods for a bird

By sleight of wing

To better its perch for the night,

Though it still could sing.

 

The last of the light of the sun

That had died in the west

Still lived for one song more

In a thrush's breast.

 

Far in the pillared dark

Thrush music went --

Almost like a call to come in

To the dark and lament.

 

But no, I was out for stars;

I would not come in.

I meant not even if asked;

And I hadn't been.

 

Robert Frost, 1942

 

 

Crossing and Polking. Everything is signs.

About the Art of Jong Kyu Park

Gregor Jansen

Director of Kunsthalle Duesseldorf

 

All life comes from water. As we have known for several decades, all life that has been on earth and exists comes from water. However, the sea is not only the source of life in the past, possibly millions of years ago through solar radiation, refraction of light and nutrient content of water a molecule development took place, from which the first unicellular organisms could develop, but it is also of central importance for present and future. It is a fact that the sea today is home to an immense number and variety of living creatures - from microscopically small unicellular plants to the largest living animals, a highly complex ecosystem which, unfortunately, humans are currently destroying rapidly and severely. Furthermore, the water, the sea, the ice masses of the polar caps or the clouds in the sky have an enormous and direct influence on all other habitats on our world, the earth.

Jong Kyu Park has animated a waterfall, a cascade of water that flows down infinitely, bright and clear against a black background. It symbolizes the passage of time, elements and life, a cycle of things in the midst of nature. Nevertheless, its water is artificial, a pure algorithmic formula that makes us think of water in view of the white pixels on a screen. In addition to the manifold associations with water, the cascades in Park also hold numerous associations ready to interpret the pixel stream as white noise, as a metaphor of the infinite data stream of global nature, as communication, the matrix, the illusion of the virtual, and the permanent mixing of the virtual with the real and our imaginary worlds on manifold levels. The world is not only water, or to put it another way, all life comes from water, the world is also a sign, or every meaning "readable", and thus recognizable for humans comes from signs.     

The exhibition by Daegu-born artist J. Park deals with these signs of the analogue and digital "readability" of a rapidly changing and radically changing world. If he primarily negotiates painting, but also video works and installations, he convincingly creates an impressive image of painting in the imagined three-dimensionality without vanishing points or a central perspective. Since 2015, grid dots, a matrix based on the pattern of "dots" and "lines" derived from the smallest unit of digital images, the pixels, have primarily been used here. He himself uses the obvious term "noise", as we know it from water, river or sea, but also as "white noise" in signal transmission. White noise is a noise, or sound, with a constant power density spectrum in a given frequency range. As an image, it is the now obsolete crackling of the screen when no signal is transmitted anymore. Noise and other disturbing sounds are subjectively perceived as less loud and disturbing when superimposed with white noise. As sound in modern music it is interpreted as "something excluded" and in Park's work means sound or "noise", static in all its facets, but also that noise or signal disturbances in the productive sense are excluded from the streamline society or mainstream art, immediately go down in the sea of the synchronized. 

The artist has developed a pictorial language for this that encodes the question of the representability of productive visual disturbances in dots and lines in order to define it as the enclosed excluded. This leads to the dissolution of the frame of binary opposites between yes and no, 0 and 1, right and wrong, and between black and white. 

His exhibition at the Daegu Art Museum is entitled "Kreuzen" (Crossing), which in German represents the genitive form of the plural of cross and is used as a term in sailing. But in connection with the tilde it is also an extension into the approximate, negated or a variable. It means to sail in a "zigzag course" to a destination which lies in the wind, as it cannot be sailed straight because of the headwind. But it can also mean "cruise", where a cruise means a vacation on a cruise ship, where different tourist destinations are called along a certain route. The term has its origin in the Dutch word "kruiser" from the 17th century. I suspect that the use of this term in his current series of works and exhibition - unlike the series since 2015 "Encoding" in 2015, "Maze of onlookers" in 2016, "Embodiment" in 2017 and 2018, which have been a phase of exploration and realization - now since this year has meant the wish that it is a voyage of discovery into the future, a changing course, a cruise on the wide sea from which all life originates.

If you want to understand the sea, the oceans and the water, you have to travel, observe, examine, explore and analyze it. The sea itself can be seen as a large, dynamic ecosystem. However, there are many other independent ecosystems within this ecosystem, such as numerous tropical coral reefs, rough coastal waters and even the open sea - the oceans. But more important here in connection with Park's exhibition is the noise, the sound of the sea or water, as an infinite stream of data in the flow of time.  

 

In his philosophical works on image theory, Ludwig Wittgenstein provided important approaches to understanding language and images in the context of their sign systems. Visual and word art are examined to see how they shape "reading". At first Wittgenstein apparently formulated the following paradox: "The meaning of the word is what explains the explanation of the meaning". The paraphrase constitutes meaning. And the meaning of the word generates its meaning within the context of other words. In Wittgenstein's words: "Only in the flow of life do words have their meaning." Thus, for Wittgenstein there is no isolated sign that could have meaning for itself. Rather it is certain: "The sign lives in the system." Wittgenstein emphasizes that a sign is not to be equated with an object but receives its meaning in a system of signs; just like a sentence within language. The language philosophers de Saussure and Paul Ricoeur have defined it similarly: "In a system there are no absolute concepts, only relations of mutual dependence, as Saussure expressed it: "Language is not substance, but form. Understanding a sign means working with a system of elements, because "naming a thing is not sufficient". He calls the sign e.g. names, arbitrary, but not the picture sentence consisting of names, which carries a meaning. Just as language consists of more than just thing signs (name words) because of their many functions within their huge linguistic context, so this phenomenon of relationships is also heralded in Jong Kyu Park's pictorial language, in which the "thing elements" form an image like the words in a poem. While Park's vocabulary follows a free artistic selection and at first has no definite meaning in it, the compilation may create meaning. Wittgenstein reflected that only the possibility of paraphrasing reflects the inner context of the various forms of signs. Similarly, the picture is divided into its phenomenological components in order to arrive at a verbal description. It is the inner context that gives priority to the relationship systems. Wittgenstein already takes up this "way of thinking in relations" in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and even more: "Thinking is a kind of language. In the execution of this thought on image theory, the final consequence is that thought can be compared with the drawing of images. This is where the creative act of image conception begins. Decisive for the effect of mental images is their openness, even ambiguity. As the semiotician Umberto Eco states, signs are not an isolated entity, for they are to be understood as a product of a series of relations. By means of poetic or pictorial linguistic means, reading in interaction builds up a content. On this basis, a poem by Frost or a painting by Parks can be analyzed with regard to the relations that are created. If we look at Park's works in this context, we realize that a sense of "reading" the images cannot be achieved, which is to be understood differently from the early raster images of Roy Lichtenstein, Yayoi Kusama, or Sigmar Polke. The German Polke, in particular, scored highly worldwide as a "master of stylistic pluralism," which one could take literally, for it was his raster paintings created in the 1960s that established his fame as a 20th-century painter star. With the newspaper motif, he also adopted the dot grid of newspaper printing into his painting for them, where he so successfully inflated it that the traditional polka dots are sometimes interpreted as "Polke dots". 

Similar to the classical printing processes in wood or steel, newspapers were also arranged in a grid, at least as far as pictures were concerned. With the text it was also only raised for color or withdrawn, and thus no color, black and white. It can be seen everywhere that code systems are generally based on on/off, 0/1, color/non-color, etc., which also applies absolutely to digitization. Jong Kyu Park has internalized this principle and amazes us again and again with his paintings, in which, as with sheet music by composers, an entire orchestra begins to play for the musicians or conductors, not in a real, simple and moving way when looking at the notes. Similar to Sigmar Polke, Park takes great pleasure in painting the dots and lines, the grid on Op-Art or Pop-Art lines, even though his paintings have nothing in common with the works of 50 years ago. The enormous difference lies in the legibility of a world in whose stream and flow of the digital the sea from which we come has been forgotten. In Park, this sea is searched for, explored, the data stream materialized as painting and at the same time immaterially transparent. It was none other than the French philosopher Jean-François Lyotard (1924-1998) who, together with Thierry Chaput, devoted an exhibition to this subject. They curated the exhibition "Les Immatériaux" (1985) at the Centre Pompidou in Paris, which aimed at a radically new practice of philosophical thought. The exhibition, which revolved around the question of how the use of new technologies and their "immaterials" would change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the material world surrounding him, had an immensely complex scenography, a labyrinthine system with a total of 61 stations. Visitors were not provided with an auditory or written orientation for their exploration. "Les Immatériaux" is intended as a laboratory for an experience that began to emerge four years before the collapse of a bipolar world order and the global implementation of the Internet: that of disorientation. The provocative uncertainty of the public caused by Lyotard's exhibition reflected the condition of a person who, more than ever before, was in danger of losing his elementary self-evidences. Lyotard's concern was not only to see this as a danger, but also as an opportunity to test out other ways of human existence. With "Les Immatériaux" he staged "his philosophical thinking in the truest sense of the word". And he staged it by making his thinking figurative, yes, by turning it into a picture, and thus anticipating his time. The fact that images often overwhelm, provoke or resign us through their complexity, their contradictoriness, their ambiguity, is no longer a reason for the practice of this thinking to reduce them to a uniform context of meaning through an act of hermeneutic arbitrariness. Here, the works of Jong Kyu Park lead us into another dimension and deal with the fascination of the simultaneously unambiguous and complex, the readable and the ambiguous. It itself moves in figurations that intertwine dots and lines, grids, codes and pixels as pictorial elements in such a way that something unplanned, completely unexpected can emerge. The artist as well as the viewer only have to allow it. This ability to allow, the susceptibility to the unexpected, however, could be that peculiar "ability" that characterizes both philosophical and artistic thinking.  And perhaps at this point an association begins to emerge between philosophy and art, the digital and the material, painting and reality, water and air (as a poetic game also here in this text), which would then no longer be merely peripheral. Lyotard put it this way: "If one believes that one can describe thinking as a selection from 'given' data [...], then one conceals the truth: the data is not 'given', but can 'be given', and the selection does not take place as a choice. Like writing and painting, thinking is actually nothing other than letting come what can be given." 

With this in mind, I congratulate Jong Kyu Park on his sensual release in his exhibition and look forward to seeing thinking and ultimately seeing, because much has been gained. Not only philosophically, but above all anthropologically in a postmodern age that is coming to an end, in which the talk of human has a lousy odor especially in the cultural sciences, and the reference to the famous final sentence in Michel Foucault's “Order of Things” (1966), that the people will disappear "like a face in the sand on the seashore", is a reverberant reminder. In or before and with the paintings and works of Jong Kyu Park, we should sit back on the beach and observe (learn to see) the sea in all its beauty and, ultimately, what is most essential, act according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