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있다. 감각이 돋보이면 그 예술 작품은 지적인 성숙함이 덜하고, 반대로 지적인 개념으로 충만한 작업은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 투박하다. 어디까지나 선입견에 의한 억측이지만, 그 선입견이란 건 경험으로 체득된 통계적 정보에서 비롯되었다. 감각과 인식의 딜레마는 미술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박종규의 미술에는 시소 놀이 같이 상호 모순적인 감각/인식의 점유율이 평행을 이룬다.

박종규의 회화는 자연 대상을 디지털의 연산 체계로 바꾸는 픽셀의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픽셀은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의 논리이지만 양(量)으로 환산되는 아날로그의 특성도 가진다. 픽셀의 양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많아지거나 수준 이하로 적어지면, 대상이 찍힌 원본은 우리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워진다. 그가 그린 그림도 이런 식이다. 화폭에 그려진 선이나 점의 연속적 패턴은 일종의 암호처럼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가 완성한 사진 작업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다. 흑백의 플레임 속에는 무너진 폐허 혹은 황량한 도시 경관이 담겨 있고 그 가운데 건물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도대체 뭔가? 이 작업은 도심 재개발 뒤에 도사린 탐욕스러운 자본에 대한 현실 참여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에 관찰자인 작가가 끼어들어 에드문트 훗설(Edmund Husserl) 식의 현상학적 환원을 시도하는 과정이다. 작가의 인식과 감각을 거친 작품들은 그것이 회화든 사진이든 조각이든 영상 작업이든 상관없이 모두 차갑다. 그만큼 절제되어 있고, 동시에 허무하다.

작가는 대상이 우리의 인지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시각화 과정에 주목해 왔다. 이 주제는 그가 작가로 출발하던 때부터 줄곧 이어져 온 것이다. 그의 장구한 고민과 비교되게, 지금 나는 턱 없이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나에게 제일 확실한 방법은 급진적 구성주의(radical constructivism) 패러다임 틀 속에서 화용 이론(언어학), 체계 이론(사회학), 형식 논리학(철학), 사이버네틱스(기술 공학), 정보 이론(신문방송학) 등 사회과학자로서 내가 늘 다루어 익숙한 이론을 끌어 쓰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비평은 작품 의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에 전시 도록을 채우는 장식적 기능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 대신 박종규의 작업을 문학적인 서사로 설명한 종래의 비평은 예컨대 시각적인 ‘잡음(노이즈)’이라고 이름 붙였다. 작가는 말하기를, 소리에 포함된 노이즈처럼 이미지에도 일종의 노이즈가 있다고 한다. 회화에서 노이즈는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모노크롬 회화는 노이즈를 골라내어 버린 순도 높은 예술적 원칙이었다. 박종규의 미술은 미술가에게 요구되는 높은 숙련(감각)의 좌절, 깊은 성찰(인식)의 부재로 여겨졌던 노이즈를 복권시킨다. 그는 회화에서 의도치 않은 실수처럼 여겨지던 노이즈를 따로 모아서 화폭에 담는다.

노이즈 그 자체가 순전히 부정적인 기능만 가진 것은 아니다. 음향학에서 취급되는 대표적인 노이즈인 디스토션(distortion)이 그렇다. 이것은 전기 증폭 장치에서 입력과 출력의 펄스가 맞지 않아 소리가 찌그러지는 현상이다. 하지만 디스토션은 록 음악에서 그 파열음이 가진 카타르시스로 인하여 일렉트릭 기타가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음악 효과가 되었다. 한편, 인지 심리학에서 다루어지는 노이즈는 주된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지만 불가피하게 매력적인 요소로 처리된다. 지루한 강의가 이어지는 교실에서 바깥의 잡음은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보다 덜 중요한 정보겠지만, 순간적으로 거기에 관심이 옮겨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사회학에서 주목하는 노이즈, 즉 사회에서 늘 벌어지는 비리, 착취, 폭동과 같은 갖가지 소란스러운 사태들은 그것이 잠재적으로 품은 순기능까지 학문적으로 고려된다.

노이즈를 제거해버린 모노크롬, 팝아트, 하이퍼 리얼리즘과 같은 모더니즘 미술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성의 기획이다. 그렇지만 그 노이즈를 여기에 불러 온 박종규의 시도 또한 이성적인 개념 미술의 연장이다. 그것은 비이성적인 영역을 파헤치려는 과학적인 시도, 혹은 여기에 추함을 끌어들여 저 너머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현대 미술의 사조들과 맥을 같이 한다. 현대 미술은 관념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요소의 재구성에 대한 끊임없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시도가 박종규의 회화와 사진, 미디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러므로 나는 작가 박종규가 단순히 연대기적 서열만으로 따져서 한국 현대 미술의 담론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면서 심판하는 종결자의 위치에 있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가 작품을 통해 그 최후의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발설해야 된다고 본다. 부정의 변증법이 깔린 이 모순적인 입장이 그의 미술 세계를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매혹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끔 한다. 어떤 것은 선택되고 나머지 것은 배제되는 인식의 괄호 매기기,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이 함께 작용하는 감각의 층위, 모든 정보를 점 한 개, 선 한 줄까지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정작 의미를 감추는 냉랭한 자세가 그에게 있다. 어쩌면 시간 속 존재라는, 모든 것일 수도 있지만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이처럼 나열해 놓기 위해서 미술의 역사까지 해체하는 도발적인 태도도 함께.

(윤규홍, Art Director/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