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큰 장갑_박종규 1995

​작가노트

나는 최근에 손바닥을 종이 위에 대고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다. 아마도 장갑을 이용한 작업을 얼마간 해 왔기 때문이겠지만...

 

어릴 적 미술시간에 손을 그려보라는 숙제를 받고 손바닥을 종이위에 대고 베껴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숙제검사 때 선생님으로부터 제법 혼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때의 선생님이 지금의 나라면 어떠했을까? 나의 선생님처럼 야단치며 내가 베낀 손바닥의 실물인 나의 손을 그렇게 대나무자로 때렸을까?

아니면 조금 게으르고 엉뚱하고 꾀가 많은 나 같은 학생을 칭찬했을까? 나 자신은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던 서른이 넘은 지금 새삼스럽게 그때의 놀이를 다시 해 보게 되었다. 우연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이곳 파리의 지도위에 다시 나의 손바닥을 그려보았다. 조금은 장난기 있는 심정으로, 혹은 그렇게도 부끄러웠던 그때부터 이십년도 더 지난 추억으로.

 

이곳의 생활 특성상 하루에도 몇번씩 지도를 보는 것이 보통이며 차가 있는 나로써는 누구집을 찾거나 공공기관에 일이 있을 때면 몇 번이고 지도를 찾게 되는 것으로 그 지도 위에 손을 대고 그린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발견은 분명 아닐 것이지만.

 

이제 좀 더 책임감 있는 놀이를 시작했다.

 

내가 그린 지도위의 손바닥 윤곽선을 따라 스스로 직접 지도상의 길을 걸어서 지점을 지도 위에 표시하고 그때의 인상을 사진으로 글로 남기기로 했다.

 

미술숙제였던 종이 위에 그린 나의 손바닥과는 좀 다른 더 크고 더 넓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손으로가 아닌 발로써 걸으면서 그 때의 그 손바닥을 그렸다.

 

내가 그린 <파리>의 손바닥은 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활의 이야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어쩌면 몇 장의 사진으로만은 확인할 수 없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장갑, 또는 나의 손바닥은 삶과 생활 속의 슬프고 기쁜 일들을 담을 것이다. 마치 장갑이 손을 담는 것처럼.

 

어릴적 그 미술시간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때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때의 선생님에게 미술숙제를 좀 더 완벽하게 다시 검사 받고 싶은 마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