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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적 시간

 

이진명

전 대구미술관 학예실장

 

어떤 기자가 질문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과 일본의 모노하(物派), 그리고 한국의 단색화는 서로 어떠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까?” 상당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이에 최명영(崔明永, 1941-) 선생님께서 통찰력 있는 대답을 해주셨다. “미국의 미니멀리즘은 지향성, 즉 작가가 세계에 자신을 표명하는 태도(attitude)를 중시한 것입니다. 일본의 모노하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relation), 나아가 나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조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단색화는 과정(process)의 통찰 속에서 작품이 탄생합니다. 과정은 사유이면서 수양입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입니다. 자신을 화면에 일치시켜 사람과 그림이 둘이 아니라는 진리를 얻으려는 치열한 과정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정신과 도리[道]가 모두 잉태됩니다.” 이 대가는 그 어려운 질문을 세 단어로 압축해냈다. 태도(attitude), 관계(relation), 과정(process)으로 난해한 질문은 명료한 개념으로 응결된다.

 

미국의 미니멀리즘은 확실히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적 기제가 작용하면서 출발했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를 정신분석의 프레임으로 해석하던 당시의 시류에 반발하면서 미니멀리즘은 세 개의 의제를 던졌다. 하나는 산업공정을 예술계에 도입하는 것은 어떤가? 두 번째는 작품은 반드시 미술관과 갤러리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야외나 건물의 유휴지,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작은 쉼터는 어떤가? 또 하나, 인간이 소외되고 휴머니즘에 대한 신뢰에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한 무렵, 더 이상 무엇을 표현하고 인간의 승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이 가능한가? 무의식을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가장 합리적 정신으로 아우슈비츠를 만들었던 우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통제되지 않는 무의식은 더욱더 위험해 보인다. 이것은 확실히 세계와 시류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일본의 모노하는 예술의 근본적인 위상을 처음부터 흔들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현실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계는 천상의 저편에 따로 존재한다. 현실은 진리계의 모방에 불과하다. 예술은 진리계의 모방인 현실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두 번을 모방한 이중모방이다. 예술은 수면(水面)에 비춘 이미지, 거울 이미지, 동굴의 그림자처럼 허상이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플라톤에게 예술의 창조란 이중 속임수이기에 나쁜 것이다. 모노하는 창조를 애초에 포기하고 현실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했다. 돌, 종이, 숯, 나무, 철판, 찰흙을 최대한 가공하지 않고 사물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하이데거는 “지금 존재하는 것은 어째서 다른 것이 아니라 하필 이것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서구 형이상학이 근원부터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이 순간 존재하기 위해서 수많은 다른 확률이 잠재적으로 은폐된다. 그러나 다른 확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주사위의 숫자 하나를 얻으면 나머지 다섯 숫자가 나올 확률은 일시적으로 은폐된다. 주사위에서 얻은 숫자 하나의 경우의 수는 그만큼 중요하고 아슬아슬한 것이다. 하물며 어떤 사람이 존재하여 어떤 사물과 만난다는 사실은 주사위보다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일본의 모노하는 존재의 의미를 파악해가는 모험이다.

 

한국의 단색화, 혹은 한국의 모더니즘 예술은 과정을 중시한다. 미니멀리즘과 모노하와 천양(天壤)의 차이가 있다. 작업의 부단한 연속을 통하여 어떠한 의도나 계획은 잠시 잠재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되고 자아의 망각 속에서 진정한 내가 드러난다. 자아는 일종의 마스크이다. 아버지라는 나, 자식이라는 나, 직업인으로의 나, 이상을 지향하는 나는 모두 마스크이다. 우리나라 화가들은 부단한 작업 과정 속에서 수양의 내공을 빚는다. 수양의 내공은 마스크를 산산이 조각낸다. 부단히 이어지는 수양의 세월 속에서 마스크를 벗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된다. 새로운 나는 예술가의 나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사람 자체”라는 뷔퐁 백작의 대전제를 확인하게 된다. 한국의 모더니즘 회화는 촉각적이다. 그 촉각성(palpability)은 예술가의 호흡과 영혼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나아가 모더니즘 회화는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초월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禮樂刑政]를 성찰하며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天人之際]를 바르게 설정한다. 따라서 “글(예술)이란 가지의 무성함을 이루었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뿌리를 근원적으로 파악한 글(예술)이야말로 갖추지 못한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옛 사람의 예술관이 실현된다.

 

박종규 작가는 태도(attitude), 관계(relation), 과정(process)을 모두 통섭한다. 박종규는 작가의 감각이나 직관으로 일임하는 뭇 작가들과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다. 철저하게 서구의 예술사를 탐구했으며 우리의 옛 어른들의 예술관을 성찰하면서 과정을 밟아왔다. 박종규 작가는 우선 가치에 대해 치밀하게 생각했다. 세계는 질서와 혼돈이 상대를 이룬다. “한번 따뜻한 기운이 오고 또 한 번 차가운 기운이 갈마드는 것을 도리라고 한다.”는 유명한 경구를 차치하더라도 질서와 혼돈은 한 번씩 세계에 갈마든다. 따라서 여조겸(呂祖謙1137-1181)은 말했다. “세계의 이치는 상대가 없었던 적이 없다. 이는 천지의 항상적인 준칙이며 위대한 역(易)이 말하는 정의이다.” 따라서 미추, 호오, 선악, 장단, 부귀, 존비의 가치는 상대를 갖는다. 박종규 작가가 설정한 문제는 질서가 좋다고 여기는 것도 인간의 편견이며 혼돈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견이라고 파악한 곳에 자리한다.

 

질서는 조화, 균제, 정제와 같은 개념을 포섭하며 혼돈은 과잉, 편파, 불균형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박종규 작가는 ‘노이즈(noise)’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노이즈는 하모니의 상대개념이다. 이 둘은 서로 갈마들기에 존재의 가치를 보장 받는다. 세상에 하모니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모니만을 구축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노이즈를 양산해왔다. 문명을 뜻하는 팍툼(factum)은 자연을 뜻하는 다툼(datum)을 파괴시키면서 존재해왔다. 반대로 다툼은 팍툼에 대항하며 몸을 떨고 (지진) 자기의 피와 땀을 인간이 거주하는 대륙에 퍼붓는다. (해일) 서구의 문명은, 그리고 예술사와 철학은 하모니를 갖는 팍툼을 위해서 수많은 노이즈(엔트로피)를 만들어왔다. 노이즈는 문명의 그림자이다. 박종규 작가는 노이즈를 컴퓨터 화면 속에서 발생한 픽셀 노이즈에서 찾았다. 화면에 생긴 불균형하고 파괴된 노이즈 화면을 확대하면 균제를 이룬 정상적 화면의 픽셀과 그 어떠한 차이도 없다. 오히려 나름의 질서와 아름다운 규칙이 발견된다. 모든 존재를 분석하면 조직, 분자, 원자, 미립자로 계속 쪼개면 나중에는 파장이며 종국에는 무(nothing)로 규결되는 것처럼 노이즈와 균제 사이의 본질에 대해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박종규 작가가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이다.

 

일본의 모노하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의 창조와 창안이라는 근본적 상념을 뒤흔들었다면, 박종규 작가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무한히 확대된 노이즈 픽셀 이미지가 세계의 밖으로 출현했을 때, 그것이 캔버스의 화면으로 재탄생되고 조각의 볼륨을 얻었을 때, 그 존재와 세계와의 관계가 지시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미디어 이론을 참조하면 박종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태초의 인간은 이미지와 현실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마술이었다. 그림은 현실의 예고편이자 의식이었다. 동물을 그리면 그 동물을 사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지는 사람들을 마술 속에 가두었고, 당시 사람들은 이미지가 더 나은 세계 경영에 방해된다고 판단했다. 그 순간이 오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사람들은 마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문자를 개발했다. 문자는 시간이 순환적이라는 통념을 바꾸었다. 문자의 개발은 시간이 직선으로 나아간다고 믿게 했다. 즉, 역사의식을 형성했다. 역사의식은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다고 믿는 신념을 주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성의 발생이다. 이성은 현실의 현상을 알파뉴메릭(alpha-numeric code)으로 재단하는 능력이다. 이 코드는 과학 공식으로 발전했고 급기야 컴퓨터를 만들었다. 그런데 컴퓨터는 이성으로 만든 이미지이다. 이성과 마술은 정반대여야 하는데 컴퓨터 이미지 속에서 그 둘은 절충된다. 이러한 현상을 빌렘 플루서는 앱서디티(absurdity), 즉 부조리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마술에서 부조리로 가는 여정이다. 박종규는 가장 앱서드한 이미지를 철학적으로 구성해낸 것이다. 박종규의 이미지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근래 다시 회자되는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의 커플링 개념으로도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박종규 예술의 미감이다. 철학적 난제를 끊임없이 파헤치는 그의 저력보다도 눈부신 것은 예술적 미감이다. 그 미감은 모더니즘의 성지인 대구의 선학들로부터 길러진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나라 모더니즘 회화는 과정을 중시한다. 과정 속에서 인간의 근본을 찾고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이라는 우리의 오랜 전통을 체현시킨다. 문(文)이란 단순한 글뿐만 아니라 인간의 예악형정을 포함하는 상위개념이다. 예술도 따라서 여기에 포함된다. 문이 도리[道]를 싣지 못하면 그것은 문이 아니다. 박종규의 철학은 노이즈를 통한 인간 세계의 성찰에 있다. 노이즈는 하위의 위상을 면치 못했다. 박종규는 하위의 노이즈개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아름다움을 극화시키면서 모든 차별과 부당에 반대한다. 선학의 예술가들은 호흡과 수양을 통해서 과정주의적 회화를 빚어왔다. 박종규는 문명사의 탐구와 현대문명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과정주의적 회화를 창안했다. 컴퓨터의 노이즈 픽셀을 확대하여 시트지에 올리고 오려서 캔버스에 붙이고 물감을 바르고 떼어 내는 과정 속에서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전복된다. 그것은 무차별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지이다.

 

무차별을 지향하는 과정은 따라서 시적 시간(poetic time)이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불의 정신분석(Psychoanalysis of Fire)󰡕에서 그 화염을 발산시키면서 자기의 몸을 태우는 촛불을 이야기한다. 실체를 없애면서 수직적으로 솟아오르는 화염은 순수정신이다. 자기의 발목을 붙드는 촛대(현실)로부터 무차별의 창공으로 상승하려는 의지는 순수정신이다. 순수정신이 깃드는 시간을 수직적 시간(vertical time)이라 한다. 수직적 시간은 수평적 시간과 종류를 달리 한다. 수평적 시간은 일상적 시간이다. 일상의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시간이며 촛대의 육신을 위한 시간이다. 수직적 시간은 예술적 시간이다. 시적 시간과도 동의어이다. 그것은 육신으로 매어있는 차별적 현실로부터 무차별의 세계로 승격되는 아주 드문 시간이다. 박종규 작가는 무차별한 가치 속에서 예술적 시간을 선취해낸다. 그리고 무차별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깨닫는 순간을 바로 수직적 시간이라고 한다. 따라서 D. 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우주와 세계, 또 인류 모두는 물론이고 나라와 가족 구성원과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에 의식적으로 저항한다. 우리는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질병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연결을 부수어야 하고 스스로 고립되고자 한다. 우리는 자유를 외치며 하나의 개인을 부르짖는다. 우리는 살아있으며 육체 속에서 우주를 육화시키고 있다는 황홀함과 춤춰야한다. 내 눈이 나의 부분인 것처럼 나는 태양의 한 부분이다. 내가 대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내 두 다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의 피는 바다의 한 부분이다. 나의 영혼은 내가 인류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위대한 사람의 영혼과 유기적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조국의 한 부분이다. 나의 내밀한 자아 속에서 나는 가족의 일부분이다. 정신 말고는 혼자만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이루어진 나는 없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 역시나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수면에 비춘 햇빛의 반짝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수직적 시간이나 D. H. 로렌스의 세계와 연결된 나라는 개념은 서로 둘이 아니다. 박종규 작가의 무차별적 위계전복 역시 앞의 두 사상가와 인식을 함께 한다. 박종규의 회화 작품은 과정주의적 회화의 정수인 동시에 존재의 무차별을 주장하면서 관계의 보다 성숙된 경지를 열었다. 미국의 미니멀리즘이 1960년대의 산업주의를 미술계에 안착시켜서 얻으려는 지향점이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감이었다면, 박종규 작가가 메타버스로 이해되는 현시점의 의제(議題)를 남들보다 앞서 회화로 선취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앞으로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세계의 예술이 스펙터클(spectacularism)과 센세이셔널리즘(retro-sensationalism), 그리고 반복 모더니즘(remodernism)으로 점철될 때, 박종규 작가는 철학적 내용과 과정주의적 회화라는 의제를 새롭게 제기했다. 더욱이 그 미감에서는 우리의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있다. 1848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동생 김상희(金相喜, 1794-1861)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개 글을 짓는 데는 깎아 버려서 간결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만 더 보태고 늘리는 것을 오히려 귀하게 여기는 곳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깎아버리는 것만을 정격(定格)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음향(音響)과 절주(節奏)에도 관계가 있으니 시의 율법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 어찌 할 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 나중에 충분히 상의해보면 좋겠다.

 

추사는 간결성이 글의 전부가 아니며 음향과 절주 등 여러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정격을 뛰어넘는 창조적 창발(創發)을 제시하고 있다. 추사 역시 그 창조적 창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서면에 모두 표현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박종규 작가는 태도(attitude), 관계(relation), 과정(process)을 모두 통섭시킨다. 거기에 수직적 시간과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나라는 개념을 연동시키고 있다. 나는 창조적 창발이 바로 그러한 통섭의 능력이며, 우리의 미감과 미적 태도를 부단히 지키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박종규의 예술세계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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