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Unseen Arrives First
박효린
대구 문화예술회관 학예연구사
보지 못한 것들이 먼저 도착한다.
– 노이즈의 미학, 유령의 정치학 –
The Unseen Arrives First
The Aesthetics of Noise and the Politics of the Spectral
Ⅰ. 비트가 꺼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회화
스크린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보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짧은 찰나 동안 이미 수많은 데이터는 잘려 나가고, 알고리즘이 ‘보여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정보들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밀려난다. 한 번도 타임라인 상단에 떠오르지 못한 이미지들, 통계에서 잡음으로 처리된 수치들, 전송 오류로 깨져 버린 픽셀들. 오늘의 세계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대한 층위를 배경으로 돌아가고 있다.
박종규의 회화와 설치, 미디어 작업은 바로 그 배경, 즉 비트(bit)가 꺼진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의 화면은 반짝이는 메인 이미지를 선명하게 제시하기보다, 신호와 신호 사이에 숨어 있던 미세한 떨림, 비트스트림(bitstream)의 틈에서 새어 나온 노이즈를 붙잡는다. 이러한 노이즈는 한 번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고, 다시 미세한 흔적으로 되돌아오는 정보의 잔향이다. 바로 이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존재들’이 이번 전시 제목이 가리키는 ‘비트의 유령들’을 형성한다. 삭제와 필터링의 이면을 떠돌던 것들이 그의 캔버스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밀도와 리듬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그렇게 모습을 얻은 ‘비트의 유령들’을 단순한 잔여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으로 수렴한다. 예술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묻는다. 예술은 우리가 보지 못한 채 지나쳐 온 감각의 구조를 어디까지 다시 설계할 수 있는가.
Ⅱ. 노이즈, 오류 이후의 질서
디지털 환경에서 노이즈는 전통적으로 ‘걸러야 할 것’으로 취급됐다. 압축 과정에서 버려지는 정보, 통계를 흐리게 만든다고 삭제되는 이상값, 인공지능 학습 데이터셋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고 빠져나간 이미지들. 효율과 속도를 우선하는 체계에서 노이즈는 언제나 제거의 대상, 잉여의 이름이다.
그러나 박종규에게 노이즈는 오류가 아니다. 그는 노이즈를 체계의 균열 속에서 태어나는 또 하나의 질서이자, 존재의 미세한 떨림으로 바라본다. 기술적 연산체계가 완전무결해질수록 인간의 자리는 협소해질 것이라는 불안이 커지는 시대에, 그는 그 연산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에러값, 정제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찌꺼기 속에서 인간성의 증거를 찾는다.
노이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계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세계는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논리와 알고리즘의 그물망 사이로 흘러나오는 값들, 설명될 수 없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떨림들이 있다.’라고. 박종규의 회화는 바로 이 미세한 진동에 귀 기울인다. 그것은 디지털 이미지의 단순한 변형이 아니라, 완결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보고서가 된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 “사라짐과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간의 진동 속에서 노이즈는 인간 존재의 지속성과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노이즈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아직 닫히지 않은 세계의 증거이며 불완전함 자체가 지속성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의 형태로 우리 앞에 선다.
Ⅲ. 삭제된 것들의 초상 –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
박종규의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줄 한 줄, 한 점 한 점이 ‘버려진 것들의 복귀’처럼 다가온다. 원래는 사라져야 했을 정보, 기록에서 지워져야 했을 비트들이 캔버스 전체를 가득 메우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다. 가시성의 바깥으로 밀려난 것들, 타임라인의 심연 아래로 가라앉은 이미지들, 유통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데이터들. 그의 노이즈는 이런 존재들을 다시 호출한다. 이들은 더 이상 주변부의 배경이 아니라 화면의 주연으로 등장한다. 이 점에서 그의 화면은 역설적으로 ‘삭제된 것들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좋다.
점과 선의 반복, 패턴의 진동, 색면의 간섭은 처음에는 차갑고 기계적인 그래픽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 응시할수록 그 표면에서는 묘한 정동(情動)과 불안, 설명되기보다는 먼저 체감되는 울컥거림이 배어 나온다.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는 듯하다가 미묘하게 삐거덕거리는 리듬, 칼같이 직선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손의 떨림이 드러나는 표면.
박종규의 노이즈는 기계의 오류라기보다 인간과 기계가 접촉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감각의 울컥거림’에 가깝다. 그 감각은 세련된 추상의 쾌감이라기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보지 않고 지나쳐 온 것들—실패, 흔들림, 예외, 에러—이 서서히 되돌아와 시야를 점유하는 과정에 가깝다. 노이즈는 그렇게 시스템이 남긴 주석 없는 주석이 된다. 무엇이 데이터로 승인되고 무엇이 잡음으로 추방되는지, 누구의 얼굴은 저장되고 누구의 흔적은 삭제되는지, 그의 회화는 직접적인 선언 없이도 그 구조를 드러낸다.
알렉산더 갤러웨이(Alexander Galloway)가 분석하듯, 디지털 네트워크는 정보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을 결정하는 분배구조로 작동한다. 박종규의 화면은 바로 그 구조의 가장자리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는 디지털 정치학을 조용히 드러낸다.
Ⅳ. 수직적 시간 – 스크롤 이후의 회화
오늘 우리의 시간은 주로 스크롤의 형태로 경험된다. 끝없이 내려가는 타임라인, 위로 밀려 올라가는 알림창. 중요한 것, 많이 소비된 것, 자극적인 것이 화면의 위쪽으로 떠오르고, 나머지는 ‘더 보기’ 버튼 아래로 가라앉는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연속이라기보다, 위와 아래, 더 보이는 것과 덜 보이는 것의 위계로 배치된다.
박종규의 「수직적 시간(Vertical Time)」 연작은 이 시간 구조를 조용히 전복한다. 촘촘한 세로줄과 도트 패턴으로 가득 찬 화면은 처음에는 하나의 균질한 리듬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표면은 수많은 층위가 겹친 흔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디지털 노이즈 이미지를 전사하고, 일부는 지우고, 다시 덧입히고, 또 다른 색을 올려 가리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화면에는 하나의 단일한 현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지금들’이 수직으로 쌓인다.
여기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침전하는 것에 가깝다.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진행되는 서사의 선이 아니라, 한 화면 안쪽으로 스며들며 층이 쌓이는 깊이의 문제로 바뀐다. 관람자는 이 화면 앞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추게 된다. 멀리서 볼 때 하나의 파형처럼 보이던 화면이, 한발 다가서는 순간 미세한 떨림과 틈으로 분해된다. 어긋난 패턴 하나, 농도 차이 하나가 갑자기 시간의 증거로 다가온다.
이때 그의 회화는 추상화의 오래된 언어를 빌리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과거의 단색화가 비워냄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소환했다면, 그의 화면은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쌓여 버린 시대’의 감각을 수용하면서도 그 속에서 지워진 것들의 흔적을 다시 드러낸다. 이것은 스크롤의 시간 이후에 도착한 회화이다. 빠르게 넘어가는 피드를 잠시 멈추고, 그 아래 깔려 있던 다층적인 시간의 지형을 다시 더듬어 보게 만드는 회화이다.
노이즈는 여기서 단순한 시각적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짐과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간의 진동을 가시화하는 도구이며, 그 진동 속에서 인간 존재의 지속성과 불완전함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감각의 장치이다.
Ⅴ. 유령들 사이에서 보는 법 – 기술과 인간성의 경계에서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유령’은 단순한 장식적 은유가 아니다. 유령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완전히 도착한 것도 아닌 상태의 존재이다. 이미 지나갔다고 여겨지지만 계속해서 돌아오고, 아직 형체를 갖추지 않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어떤 것. 박종규의 노이즈는 바로 이 유령성의 회화적 구현이다.
기술이 만든 인위적 세계 속에서 감각의 우선순위와 구조는 점점 더 기계의 논리에 종속되고 있다. 무엇이 먼저 보이고 무엇이 끝내 보이지 않은 채 남는지, 무엇이 저장되고 무엇이 덮어 쓰이는지의 결정은 점점 더 알고리즘의 몫이 된다. 이때 인간성은 체계의 외부가 아니라, 체계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부분들에 잔향처럼 남는다.
박종규가 다루는 유령들은 바로 그 잔향의 형상이다. 기술로 잃어버린 인간성의 잔향이 그가 만들어내는 유령들 속에서 사라진 신호이자 여전히 존재를 꿈꾸는 감각의 증거로 되살아난다. 매끈한 패턴 사이에 숨어 있는 작은 어긋남, 지나치게 규칙적인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미세한 떨림들은 체계가 끝내 지우지 못한 인간적인 것의 흔적처럼 다가온다.
이러한 작업은 기술과 예술, 유산과 미래가 서로를 반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원’을 예감하게 한다. 더 이상 시간을 멈춘 불변의 형상으로서의 영원이 아니라, 삭제와 생성, 망각과 회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진동 속에서 계속해서 흔들리는 영원이다.
최근 그의 작업이 한국을 넘어 중국과 이집트 등 서로 다른 장소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노이즈 개념의 보편성과 동시에 강한 장소성을 드러낸다. 중국 광둥 미술관과 같은 대규모 미술관 전시에서는 노이즈가 고밀도의 도시 인프라와 빠르게 순환하는 이미지 환경을 배경으로, 디지털 시대의 속도와 과잉을 비추는 감각적 장치로 읽힌다. 반면 기자(Giza) 피라미드 앞에서 선보인 대지 설치 작업 〈영원의 코드〉에서는 피라미드의 비례, 사막 위에 흩뿌려진 아크릴 미러 점, 모스 부호로 암호화된 텍스트가 노이즈의 언어와 결합해 고대의 비례 코드와 현대의 디지털 코드를 한 장면 안에서 교차시킨다. 이 두 장소의 경험은 노이즈가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명과 시간, 기술 체계 사이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번역해 드러내는 작가의 핵심 언어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Ⅵ. 아직 끝나지 않은 세계를 위한 선언
박종규의 작업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예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의도적으로 불완전함, 남겨진 것, 오류로 분류된 값에 머문다. 노이즈는 그에게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이 세계가 아직 인간 없이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이 예술의 영역까지 잠식하는 지금, 그의 작업은 역설적인 희망을 제시한다. 예술이 해야 할 일은 기계보다 더 정확하게 재현하거나, 데이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고유한 역할은 체계가 정리한 것들, 보이지 않게 된 것들, 오류와 예외로 남겨진 것들을 위해 또 다른 감각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노이즈는 그 자리의 이름이다.
박종규의 화면에서 노이즈는 삭제된 것들의 초상이자,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감각을 위한 예비 공간이다. 그 작은 떨림 속에서 기술로부터 조금씩 밀려난 인간성이 다시 한번 숨을 고른다. 완전무결한 이미지를 향해 질주하는 시대에 그는 불완전함의 편에 서서 말한다.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아직 다 보지 못한 것들이 먼저 도착하고 있다고. 그 말이야말로 지금 여기서 예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선언일지 모른다.